무슬림들은 정말 위험한 사람들인가?
작성자
터키친구들
작성일
2022-05-05 22:42
조회
209
에코 체임버(Echo Chamber)에 갇힌 사람들
최근 우리나라에 입국한 삼백여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에 대해서 그들이 전부 무슬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긴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슬람교는 지난 1400년 동안 많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안내한 종교로 이에 대한 경계와 주의가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슬람교를 신앙으로 갖고 살아가는 무슬림 대부분은 자기들의 종교가 왜 이슬람인지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혹은 관심 없이 그냥 살아간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성스럽게 여기는 꾸란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이슬람 절기에 따라 계속하는 라마단 단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일 년에 한 차례씩 희생절 행사를 통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왜 속죄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또, 그들의 알라 앞에서 ‘왜?’라고 질문하고 싶어도 감히 그러지 못하고 무조건적 복종과 충성을 다짐하는 무슬림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전혀 선택의 여지 없이 운명처럼 주어진 이슬람 신앙은 마치 에코 체임버(Echo Chamber) [1] 같은 환경을 가진 사회와 문화 안에서 고정 잣대와 편견의 틀 안에서만 밖을 내다보려고 한다.
유럽 사회에 형성된 무슬림 ‘게토’
지금 우리 사회 안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국내에 점차로 많아지는 무슬림들을 바라보면서 유럽 무슬림 사회로부터 만들어진 소위 ‘게토’[2] 현상이 우리나라에도 형성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나라도 유럽 사회처럼 무슬림들 때문에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갈등의 가능성을 예상하며 염려의 눈길로 바라본다.
그러나, 사실 유럽 안에 형성된 무슬림 ‘게토는 유럽사람에게 그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즉, 유럽 내 무슬림 집단화로 인한 사회 불안 조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 땅에 들어온 무슬림들을 멀리하고, 이웃으로 다가가기를 거부한 유럽사람들에게 먼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만약 기독교 문화와 사회로 이루어진 유럽 사회가 여러 이유로 그 땅을 밟은 무슬림들을 향해 다가가서 따뜻한 이웃 사랑으로 대했더라면 무슬림들의 게토는 절대 그 땅에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사람은 자기들과 다르게 보이는 무슬림들을 피해 지나갔고, 다가가지 않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았기에 그곳 무슬림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소외되었고, 생존본능 속에서 그들 자체의 ’게토‘를 만들어 문을 닫고 살아가기 시작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만약 유럽에서처럼 무슬림 게토 사회가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 사람이 국내에 들어와 도움이 필요한 이주민, 근로자, 또는 난민으로서의 무슬림들을 냉대와 멸시로 멀리하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갖기를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일에 우리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부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하나의 반면교사(反面敎師)
이제, 우리는 무슬림 게토가 만들어진 오늘의 유럽 사회를 바라보면서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금 우리 교회는 30여만 명의 무슬림을 포함해서 250여만 명의 외국인을 이웃으로 두고 살아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주님께서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불쌍히 여기는" 이웃 사랑으로 다가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것인지에 관한 중대한 결단 앞에 서 있다. 우리는 국내로 이미 들어온 저들을 향해 잘 알지도 못하는 편견과 오해 속에서 막연한 두려움으로 저들을 피하고 지나가다가 국내에서도 무슬림들의 ‘게토’를 재현시킬 것인가? 아니면, 저들 곁으로 다가가서 저들이 자기들의 ‘게토’를 만들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도록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그들을 품고 함께 살아가면서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할 것인가?
사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무슬림들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저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는 이웃 사랑으로 다가가기를 포기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다.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무슬림들이 아니라 강퍅한 마음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손수 보여주시고 그 사랑으로 대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무슬림 전도의 벽이 너무 두껍고, 이슬람의 문의 굳게 닫혔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정말 두꺼웠고 닫힌 것은 그들을 향해 주님의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며 다가가기를 거부한 우리 마음과 생각의 문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신다(딤후 1:7). 그러니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으로 저들을 대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본분이요, 사명이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6~37).
흥미로운 얘기, 하나 더
보통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은 이슬람의 율법(꾸란)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혹은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율법대로 할랄[3] 음식만 먹어야 하며, 허용된 할랄이 아닌 음식을 먹으면 그들의 율법을 어기게 된다.
우리 주변의 무슬림들에게 우리나라에 살면서 뭐가 가장 힘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대부분은 우리 음식에 가장 흔하게 섞여 있는 돼지고기를 부지불식간에 먹을까 가장 긴장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이런 음식 환경 하나로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무슬림들이 절대 살만한 곳이 아니다. 하물며, 이슬람 율법을 본질처럼 여기며 살아가려는 소위 ‘근본주의’ 무장 테러단체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좀 무리가 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난민으로 들어온 무슬림들 가운데 이런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과 연계되는 사람들이 간혹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위험한 사람들은 이미 국가에서 철저하게 감시 중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물론, 테러를 일삼는 일부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무섭다고, 위험하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보류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딤후 4:2)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선교로의 지상 대명령(마 28:18~20)을 왜곡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세계 곳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무슬림을 위해서도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그들도 복음을 들어야 하며, 주님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틀림없이 무섭고 혐오스러운 일부 무슬림이 존재하지만, 지금 국내로 들어와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 살아가는 저들을 굳이 피할 필요는 없으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우리 주님의 뜻이다. 만약, 무슬림을 위험하다고 경계하고 피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이 땅으로 보내주신 주님께서 주신 선교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것이 맞느냐 저것이 맞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로 시간을 소모하기보다는 언제 다시 그들의 땅으로 갈지 모르는 무슬림 이웃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 물론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운 접근 방법을 함께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By J. Kim
===
[주석]
[1] 비슷한 성향의 사람과 소통한 결과 다른 사람의 정보와 견해는 불신하고 본인 이야기만 증폭돼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정보 환경을 말한다. 원래는 방송이나 녹음 시 잔향 감을 주기 위해 인공적으로 메아리를 만들어내는 방을 말하지만, 같은 뜻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서로 동의하는 의견이 메아리처럼 반복해 울리면서 점점 더 그 의견이 고착화하고 급진화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2] 게토(ghetto)는 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빈민가를 형성하며 사회, 경제적인 압박을 받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기에 유럽에서 설치한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 나치 독일이 만든 유대인 강제수용소, 미국에서 흑인 등이 사는 빈민가가 게토에 속한다. 또한 가자 지구도 게토라고 평가된다. 유대인 집단학살이 묵인되고 유대 회당들이 파괴되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콘스탄티노플에는 서부 유럽의 도시들보다 한참 전에 게토가 있었다. 6세기쯤 콘스탄티노플에는 서부 유럽의 도시들보다 한참 전에 게토가 있었다. 1516년, 베니스 시 당국은 시내에 유대인이 거주하도록 마을을 건설하였는데, “게토”라는 이름은 이 유대인 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3] Permissible(허락된 것)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슬람법(샤리아)에 허용된 항목을 뜻하는 말로, 주로 이슬람 율법에 따라 먹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금지된 것은 ‘하람’이라고 한다. 원래, 할랄(halal)은 샤리아에 따라 사용이 허용되는 것을 의미하며, 음식뿐 아니라 의약품과 화장품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모든 것이 해당한다. 그중 이슬람 율법이 허락한, 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할랄 식품(Halal Food)이라 하여 별도로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법에서는 돼지고기와 동물의 피, 부적절하게 도축된 동물, 알콜성 음료와 취하게 하는 모든 음식, 육식 동물과 맹금류 그리고, 앞에서 언급된 품목이 함유된 모든 가공식품이 금지되어 있으며 '부적절하게 도축된 동물'이 금지된다는 말은 허용된 동물이라도 ‘자비하’라고 부르는 이슬람 도축 방식에 따라 도축한 것만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본 글에 대한 모든 권한은 집필자에게 있으며 영리 및 상업적 목적에 사용 시에는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 Copy right. [출처] 밖에서 본 이슬람 / 김종일 저 / 드림북
최근 우리나라에 입국한 삼백여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에 대해서 그들이 전부 무슬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긴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슬람교는 지난 1400년 동안 많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안내한 종교로 이에 대한 경계와 주의가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슬람교를 신앙으로 갖고 살아가는 무슬림 대부분은 자기들의 종교가 왜 이슬람인지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혹은 관심 없이 그냥 살아간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성스럽게 여기는 꾸란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이슬람 절기에 따라 계속하는 라마단 단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일 년에 한 차례씩 희생절 행사를 통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왜 속죄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또, 그들의 알라 앞에서 ‘왜?’라고 질문하고 싶어도 감히 그러지 못하고 무조건적 복종과 충성을 다짐하는 무슬림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 전혀 선택의 여지 없이 운명처럼 주어진 이슬람 신앙은 마치 에코 체임버(Echo Chamber) [1] 같은 환경을 가진 사회와 문화 안에서 고정 잣대와 편견의 틀 안에서만 밖을 내다보려고 한다.
유럽 사회에 형성된 무슬림 ‘게토’
지금 우리 사회 안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국내에 점차로 많아지는 무슬림들을 바라보면서 유럽 무슬림 사회로부터 만들어진 소위 ‘게토’[2] 현상이 우리나라에도 형성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나라도 유럽 사회처럼 무슬림들 때문에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갈등의 가능성을 예상하며 염려의 눈길로 바라본다.
그러나, 사실 유럽 안에 형성된 무슬림 ‘게토는 유럽사람에게 그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즉, 유럽 내 무슬림 집단화로 인한 사회 불안 조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 땅에 들어온 무슬림들을 멀리하고, 이웃으로 다가가기를 거부한 유럽사람들에게 먼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만약 기독교 문화와 사회로 이루어진 유럽 사회가 여러 이유로 그 땅을 밟은 무슬림들을 향해 다가가서 따뜻한 이웃 사랑으로 대했더라면 무슬림들의 게토는 절대 그 땅에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사람은 자기들과 다르게 보이는 무슬림들을 피해 지나갔고, 다가가지 않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지 않았기에 그곳 무슬림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소외되었고, 생존본능 속에서 그들 자체의 ’게토‘를 만들어 문을 닫고 살아가기 시작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만약 유럽에서처럼 무슬림 게토 사회가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 사람이 국내에 들어와 도움이 필요한 이주민, 근로자, 또는 난민으로서의 무슬림들을 냉대와 멸시로 멀리하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갖기를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일에 우리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부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하나의 반면교사(反面敎師)
이제, 우리는 무슬림 게토가 만들어진 오늘의 유럽 사회를 바라보면서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금 우리 교회는 30여만 명의 무슬림을 포함해서 250여만 명의 외국인을 이웃으로 두고 살아가기 시작한 시점에서 주님께서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불쌍히 여기는" 이웃 사랑으로 다가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것인지에 관한 중대한 결단 앞에 서 있다. 우리는 국내로 이미 들어온 저들을 향해 잘 알지도 못하는 편견과 오해 속에서 막연한 두려움으로 저들을 피하고 지나가다가 국내에서도 무슬림들의 ‘게토’를 재현시킬 것인가? 아니면, 저들 곁으로 다가가서 저들이 자기들의 ‘게토’를 만들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도록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그들을 품고 함께 살아가면서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할 것인가?
사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무슬림들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저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불쌍히 여기는 이웃 사랑으로 다가가기를 포기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이다.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무슬림들이 아니라 강퍅한 마음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손수 보여주시고 그 사랑으로 대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무슬림 전도의 벽이 너무 두껍고, 이슬람의 문의 굳게 닫혔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정말 두꺼웠고 닫힌 것은 그들을 향해 주님의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며 다가가기를 거부한 우리 마음과 생각의 문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신다(딤후 1:7). 그러니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웃 사랑으로 저들을 대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본분이요, 사명이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6~37).
흥미로운 얘기, 하나 더
보통 테러를 일삼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은 이슬람의 율법(꾸란)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혹은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율법대로 할랄[3] 음식만 먹어야 하며, 허용된 할랄이 아닌 음식을 먹으면 그들의 율법을 어기게 된다.
우리 주변의 무슬림들에게 우리나라에 살면서 뭐가 가장 힘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대부분은 우리 음식에 가장 흔하게 섞여 있는 돼지고기를 부지불식간에 먹을까 가장 긴장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이런 음식 환경 하나로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무슬림들이 절대 살만한 곳이 아니다. 하물며, 이슬람 율법을 본질처럼 여기며 살아가려는 소위 ‘근본주의’ 무장 테러단체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좀 무리가 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난민으로 들어온 무슬림들 가운데 이런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세력과 연계되는 사람들이 간혹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위험한 사람들은 이미 국가에서 철저하게 감시 중이다.
국내 입국한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여러 모양으로 섬기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온 국내 안디옥열방교회의 사역
주님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말씀하시는가?주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물론, 테러를 일삼는 일부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무섭다고, 위험하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보류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딤후 4:2)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선교로의 지상 대명령(마 28:18~20)을 왜곡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세계 곳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무슬림을 위해서도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그들도 복음을 들어야 하며, 주님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 틀림없이 무섭고 혐오스러운 일부 무슬림이 존재하지만, 지금 국내로 들어와서 우리의 이웃이 되어 살아가는 저들을 굳이 피할 필요는 없으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우리 주님의 뜻이다. 만약, 무슬림을 위험하다고 경계하고 피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이 땅으로 보내주신 주님께서 주신 선교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것이 맞느냐 저것이 맞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로 시간을 소모하기보다는 언제 다시 그들의 땅으로 갈지 모르는 무슬림 이웃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 물론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운 접근 방법을 함께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By J. Kim
===
[주석]
[1] 비슷한 성향의 사람과 소통한 결과 다른 사람의 정보와 견해는 불신하고 본인 이야기만 증폭돼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정보 환경을 말한다. 원래는 방송이나 녹음 시 잔향 감을 주기 위해 인공적으로 메아리를 만들어내는 방을 말하지만, 같은 뜻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서로 동의하는 의견이 메아리처럼 반복해 울리면서 점점 더 그 의견이 고착화하고 급진화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2] 게토(ghetto)는 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빈민가를 형성하며 사회, 경제적인 압박을 받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세기에 유럽에서 설치한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 나치 독일이 만든 유대인 강제수용소, 미국에서 흑인 등이 사는 빈민가가 게토에 속한다. 또한 가자 지구도 게토라고 평가된다. 유대인 집단학살이 묵인되고 유대 회당들이 파괴되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콘스탄티노플에는 서부 유럽의 도시들보다 한참 전에 게토가 있었다. 6세기쯤 콘스탄티노플에는 서부 유럽의 도시들보다 한참 전에 게토가 있었다. 1516년, 베니스 시 당국은 시내에 유대인이 거주하도록 마을을 건설하였는데, “게토”라는 이름은 이 유대인 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3] Permissible(허락된 것)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슬람법(샤리아)에 허용된 항목을 뜻하는 말로, 주로 이슬람 율법에 따라 먹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금지된 것은 ‘하람’이라고 한다. 원래, 할랄(halal)은 샤리아에 따라 사용이 허용되는 것을 의미하며, 음식뿐 아니라 의약품과 화장품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모든 것이 해당한다. 그중 이슬람 율법이 허락한, 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할랄 식품(Halal Food)이라 하여 별도로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법에서는 돼지고기와 동물의 피, 부적절하게 도축된 동물, 알콜성 음료와 취하게 하는 모든 음식, 육식 동물과 맹금류 그리고, 앞에서 언급된 품목이 함유된 모든 가공식품이 금지되어 있으며 '부적절하게 도축된 동물'이 금지된다는 말은 허용된 동물이라도 ‘자비하’라고 부르는 이슬람 도축 방식에 따라 도축한 것만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본 글에 대한 모든 권한은 집필자에게 있으며 영리 및 상업적 목적에 사용 시에는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 Copy right. [출처] 밖에서 본 이슬람 / 김종일 저 / 드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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